다음 글의 내용과 부합하는 것은?
고려 성종은 상업을 진흥하고자 철로 화폐를 주조해 상거래에 쓰게 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쓰지 않고, 송에서 만들어진 동전을 쓰거나, 쌀과 면포로 물건값을 매기곤 했다. 이후 고려 숙종은 즉위 초에 주전도감을 만들고 구리로 동전을 주조해 유통시키려 했지만, 이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숙종 당시에는 은을 병 모양으로 만들어 화폐로 쓰는 관행이 퍼져 있었는데, 이를 인지한 숙종은 주전도감에 명해 새로 은병을 만든 뒤 민간인들이 쓰던 은병을 이것으로 바꾸어 주고 화폐로 쓰게 했다. 주전도감에서 만든 은병은 민간인들이 만들어 쓰던 은병에 비해 그 입구가 컸기 때문에 ‘활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려 사람들은 활구로 거래하는 것이 편하다고 여겨 이를 꾸준히 썼다. 그런데 활구는 은 1근으로 주조되었기 때문에 한 개로 쌀 5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가치가 컸다. 이에 사람들은 큰돈이 오가는 거래 시에 활구를 쓰고 잔돈을 계산 하거나 소액 상품의 값을 정할 때 쌀과 면포를 썼다. 활구의 가치는 원 간섭기에 접어들어 크게 변했다. 원은 충렬왕 때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일본 원정을 준비했다. 이때 원은 자국에서 통용되던 ‘보초’를 들여와 군수 물자를 사들였다. 원의 보초는 액면에 기재된 은의 양을 실물과 교환할 수 있도록 해서 은을 들고 다닐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덜어주는 종이 증서였다. 고려에서 보초는 점차 활구와 함께 화폐 역할을 했는데, 원의 관리와 상인들이 보초를 활구로 바꾸어서 자국으로 내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 탓에 고려에는 활구 품귀 현상이 나타났고, 활구 유통량이 적어지면서 그 가치는 크게 뛰었다. 공민왕 때에는 활구 한 개로 쌀 15석을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실제로 활구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에 공민왕은 새로 은화를 주조해 공급하려 했으나 은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활구는 이후에도 계속 그 양이 줄어 공양왕 때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으며, 그 영향으로 쌀과 면포로 물건값을 정하고 거래하는 관행이 자리 잡게 되었다.
- ①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지원하기 위해 보초를 들여와 재정을 보충했다.
- ② 고려 성종은 주전도감을 두고 구리로 만든 화폐로만 세금을 받게 했다.
- ③ 공양왕은 활구를 모두 회수해 폐기하고 새로 은화를 발행해 공급했다.
- ④ 고려 숙종은 은병을 새로 만들어 화폐로 사용하게 했고 이 은병은 활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 ⑤ 충렬왕은 쌀과 면포로 물건값을 매기던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상거래에 보초만 쓰게 했다.